전편 >> https://420611zip.tistory.com/235

 


 

 

 숙취와 함께 몰려오는 지난 밤의 기억에 케이터는 제대로 일어날 수 없었다. 그는 몸을 돌려 베개 깊숙이 얼굴을 묻었다.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허리에서 비롯된 통증이 전신을 타고 돌았다.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전부 건너뛰고 몸부터 맞대면 어쩔 셈인가. 답지않은 행동에 한숨이 새어나올 것 같았다.

 ‘취한 척 한 번만 안아줘.’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꺼풀 뒤쪽에 강렬하게 떠오르는 잔상에 민망함이 북받쳤다. 케이터는 주먹 쥔 손으로 애꿎은 침대를 퍽퍽 때려봤지만 소용 없었다. 먼저 덫을 놓은 건 자신이었고, 거기에 갇혀버린 것 역시 케이터 자신이었다. 그는 베개에 파 묻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텅 빈 옆자리에는 오늘 아침 트레이가 급하게 쓰고 나간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일 때문에 옆에 못 있어줘서 미안. 일어나면 연락줘.」

 “……애인 같네.”

 제일 먼저 든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어보니 다시금 얼굴이 화끈거린다. 보는 사람도 없을 텐데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케이터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쓸어넘겼다. 일순 기다란 머리카락을 집요할 정도로 매만지던 커다란 손길이 떠올라, 그는 고개를 붕붕 가로 저었다.

 “미쳤지, 정말…….”

 트레이에 대한 감정은 일찍이 정리했다고 생각했다. 우정이라고 하기엔 무겁고 그렇다고 사랑이라고 단정 짓기엔 깊지 않은 애매모호한 감정. 그런 불확실한 감상에 더이상 젖어있고 싶지 않아 졸업 후 일부러 트레이와 거리를 두었다. 단 한 번도 트레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미치도록 그리운 건 아니었다. 스쳐지나가는 인연 중 때때로 떠오르는 추억 한 조각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재회한 이후로는 온통 트레이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우니까.’ 그런 알기 쉬운 핑계를 들어 시간이라는 앨범 속에 묻어둔 추억들을 어느샌가 하나 둘씩 꺼내 보고 있었다. 즐거웠던 사진만 꺼내면 좋았을 텐데, 그 틈새에 숨겨둔 조잡한 감정마저 줄줄이 따라 나오고 말았다. 결국엔 트레이 앞에서까지.

 ‘그치만 트레이군은 왜…….’

 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에 응해준 걸까. 혹시 아직 나를 좋아하는 걸까? 형편 좋은 가정을 늘어놓아 봤자 본인 입으로 듣는 게 아닌 이상 쉽게 와닿지 않았다. 만약 좋아한다고 해도, 이제와서 뭘 어쩌려고. 케이터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뒤로 넘기려다 다시금 겹쳐지는 기억에 손을 멈췄다. 일순 얼마전 카페에서 나눴던 대화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머리나 자를까.”

 

* * *



 “트레이군, 안녕.”

 “……어서 와, 케이터.”

 다시는 안 올 줄만 알았던 케이터가 지금 눈 앞에 서있었다. 한층 짧아진 단발이 아직 익숙하지 않은지 옆머리를 넘기는 손길이 어색해보였다. “머리 잘랐네.”, “엊그제 일은 미안.”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까.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에 잠시 멍하니 있던 트레이를 보며 케이터는 생글 웃음 지었다.

 “끝날 때까지 저기 앉아있을게~”

 케이터의 말에 트레이는 그제야 마감 도중이라는 걸 떠올렸다. 트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터는 저번처럼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솔직히 다시 찾아온 케이터를 봤을 때 간단히 인사만 하고 바로 떠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장미 왕국에 온 건 어디까지나 잠시동안이고, 이번주까지만 머문다는 건 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감 시간에 맞춰 가게로 찾아와 끝날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건 좀 더 대화를 하고 싶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장 정리를 하는 트레이의 손은 더욱 빨라졌다.

 금세 마감을 끝낸 트레이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케이터가 앉아있는 자리로 향했다. 느긋하게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케이터는 그의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급하게 일을 끝내긴 했지만 막상 케이터를 마주하니 무슨 말을 꺼내야 좋을지 다시금 고민되는 트레이였다. 역시 우선 사과 먼저 하는 게 좋을까. 그런 생각에 트레이는 먼저 운을 떼려고 했다.

 “케이터, 엊그제는—”
 “트레이군, 오랜만에 같이 날래?”

 하려던 말을 다 끝마치지도 못하고 케이터에게 선수를 뺏기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케이터의 권유에 트레이는 그의 뜻을 알 수 없었다. 날자니, 하늘을? 생각해보면 학교를 졸업한 이후엔 하늘을 날 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행술과 멀어진 건 물론, 당장 빗자루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런 트레이의 표정을 읽어냈는지 케이터는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내가 뒤에 태워줄게.”

 어쩌면 케이터는 지난 밤의 이야기를 피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다짜고짜 하늘을 날고 싶다는 케이터의 바람에 트레이는 그를 따라 빗자루에 올라탔다. 좀 더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와 더불어 간만에 케이터와 하늘을 날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트레이가 케이터의 옷자락을 그러쥐자 그는 예고도 없이 단숨에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센 바람이 온몸을 가득 감싸 트레이는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꺼풀을 너머로 느껴지는 시린 감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문득 떠오르는 기억을 완전히 불러올 새도 없이 빗자루는 급정거 하듯이 우뚝 멈춰 섰다. 못 본 사이에 비행 솜씨가 많이 거칠어진 것 같네. 그런 코멘트를 날려주려고 감았던 눈을 뜬 순간, 시야가 서서히 밝아지는 게 느껴졌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람에 나부끼는 오렌지빛 파도였다. 하얀 목 언저리에서 넘실거리는 단발머리와 그 너머로 보이는 눈부신 성. 시선 끝에 펼쳐진 건 언젠가 보았던, 때때로 그리던 추억 속의 풍경이었다.

 “트레이군 저것 봐.”

 기억보다 한층 담백해진 어조와 그와 달리 변함 없는 목소리. 머릿속으로 그 음성을 아로새길 즈음, 케이터가 고개를 돌렸다.

 “엄청 예쁘지?”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둘러싸인 동화 속의 성, 달빛을 받아 빛나는 푸른 눈동자. 입꼬리를 당겨 웃는 그 모습을 마주하자 트레이는 잃어버린 한 조각을 마침내 되찾은 기분에 감싸였다. 어느새 케이터의 옷자락을 그러쥔 주먹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고 있었다. 기껏 끼워맞춘 조각을 이번에야말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케이터.”
 “트레이군.”

 비좁은 빗자루 위에서 케이터는 트레이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앉았다. 마주한 표정에는 좀 전까지 걸려있던 웃음이 거두어져 있었다. 제법 진지한 케이터의 얼굴에 트레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케이터의 말을 끊고 먼저 붙잡으면 우리는 더욱 멀어질까. 겨우 손에 닿을 듯한 거리가 다시는 닿지 않는 곳까지 아득해지는 걸까. 지금의 트레이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와서 뭘 어쩌려고. 문득 떠오른 생각에 트레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라도 제대로……. 트레이는 케이터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케이터, 이제라도 제대로 전하고 싶어.”

 케이터는 아무 대답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 이상 말해도 되는 걸까, 여전히 트레이는 케이터의 속내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설령 닿지 않는다고 해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아무 말도 못하고 지켜만 보다가 끝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트레이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해, 케이터.”
 “…….”
 “예전부터 줄곧, 지금도 여전히 케이터가 좋아.”
 “…….”
 “사실은 훨씬 전에 말했어야 했는데 타이밍을 놓쳐서 여기까지 와버렸네, 하하…….”
 “그…….”
 “케이터?”

 고개를 숙인 채 내내 아무 말도 없는 케이터가 이상하게 느껴져 트레이는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어깨에 손이 닿는 순간 케이터는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놀란 트레이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하마터면 빗자루 위에서 떨어질 뻔한 그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내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케이터를 불렀다.

 “저기, 케이터. 괜찮아?”
 “그, 그런 말을 몇 번이고 연발하지마…….”

 케이터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제와서 뭘 어쩌려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쩌면 트레이는 자신을 여전히 좋아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은 몇 번이나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들으니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옛날처럼 야경이 보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혹시나 그때 함께 본 풍경을 트레이가 기억하고 있을까, 그게 궁금했는데. 케이터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여러 감정들을 제대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분명──아니었는데.

 “……아.”

 곧 트레이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케이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케이터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제는 짧아져 귀 뒤로 넘겨도 연신 앞으로 흘러내리는 옆머리가 그의 얼굴을 살며시 가렸다. 트레이의 얼굴에서는 어느새 긴장감 대신 옅은 웃음이 서려있었다.

 “케이터, 좋아해.”
 “…….”
 “진짜, 많이 좋아해.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그동안 말 못한 만큼 말하고 싶어. 좋아해. 좋아해, 케이터.”
 “트레이군 지금 장난해?”

 결국 못 참겠는지 케이터가 울컥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앞에서 마주한 건 사뭇 진지한 트레이의 눈빛이었다. 제법 무게감있는 눈동자와 달리 입가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운채, 트레이는 그를 보며 웃음 지었다.

 “아니, 진심이야. 좋아해, 케이터.”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 빗자루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피할 곳 하나 없는 이 비좁은 빗자루의 주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싶었지만, 눈앞의 트레이를 정면으로 마주하기 어려웠다. 원래는 트레이에게 사과하고 싶어서 찾아왔다. 하지만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말들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사실은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지 않았던 걸지도 모른다. 애초에 뭐가 미안한 건지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었다. 술에 취해서 호텔까지 실려온 일, 아니면 가려는 걸 붙잡은 일? 그게 아니면 자기 마음 하나도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하면서 이렇게 그의 감정을 무시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함께 본 야경 속에서 트레이가 바라보는 시선 끝의 피사체가 자신이라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케이터는 줄곧 모른 척했다. 트레이의 감정도, 자신의 감정도. 지금까지는 그걸로 족했다. 모른 척하면 트레이는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까.

 “케이터가 좋아.”

 그러니까, 그만하라고.

 트레이의 솔직한 목소리는 마치 마법과도 같아서, 애써 모른 척하던 감정들을 한 겹 두 겹 벗겨내려고 한다. 과연 그게 정말로 마법인지 아니면 저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음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온다. 케이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분명, 분명 사랑까지는 아니었는데.

 “……나는 트레이군 싫어해.”

 겨우 쥐어짜낸 말은 날카롭게 날이 서있었다. 더이상 가까이 다가오면 위험하다고 경고하듯이.

 “……그래?”

 하지만 트레이는 덤덤한 말투로 되물었다. 그는 케이터를 향해 손을 뻗어 앞을 가로막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살며시 쓸어넘겼다. 그 너머로 붉게 달아오른 눈가는 금방이라도 감정을 왈칵 쏟아낼 것만 같았다. 그렁그렁 눈물이 한가득 고인 눈동자는 더이상 트레이를 피할 수 없었다.

 “……어, 진짜 싫어.”

 결국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케이터는 트레이를 와락 끌어안고 말았다. 조금씩 젖어들어가는 옷자락에 게의치 않고 트레이는 조심스레 그를 마주안았다. 밤바람에 식은 몸이 생각보다 차가워, 케이터를 안는 트레이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그럼 왜 울어, 만약 그렇게 물어본다면 케이터는 정말로 화를 낼 것 같았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장난기를 모른 척하며 트레이는 다시 한 번 또렷한 목소리로 고백했다.

 “그렇구나, 나는 케이터 좋아하는데.”
 “그런 점이 제일 싫어…….”

 케이터가 고개를 들을 때까지 트레이는 열 번이 훨씬 넘는 고백을 되풀이했다. 좋아해. 좋아해, 케이터. 그의 집요함에 넌더리가 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쏟아지는 눈물이 뚝 멈춰버릴 때까지. 차갑게 식었던 몸이 서로의 체온 덕분에 조금씩 온기를 되찾아갈 즈음 케이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집요해, 트레이군.”
 “이제 그만 둘까?”

 트레이의 물음에 케이터는 조금 전까지 훌쩍이던 얼굴을 다시 그의 품에 묻었다.

 “……마음대로 해. 솔직히 몇 번만 더 들으면 홀랑 넘어갈 것 같으니까.”
 “하핫, 케이터 사랑해.”

 갑작스레 바뀐 고백 멘트 탓일까, 한순간 마력이 풀린 빗자루는 그대로 땅으로 수직낙하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트레이가 겨우 빗자루를 공중에 멈춰 세울 때까지, 케이터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급급했다.

 

* * *



 “오랜만에 가족들한테 얼굴 비추러 갈거야.”라며 케이터가 떠난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 말인 즉슨, 트레이의 고백 폭주가 이뤄진 밤으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는 소리다. 절절하고 우스꽝스러운 사랑 고백이 있던 다음날 케이터는 바로 장미 왕국을 떠났다. 애초에 따로 하는 일도 있고 거주지도, 출신지도 타국인 그였기 때문에 트레이는 그저 가만히 케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도 그는 평소와 다름 없이 카운터에 서서 창 밖으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지잉- 문득 울리는 핸드폰 알림에 트레이는 무심하게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뜬 알림을 본 그는 곧장 핸드폰을 들어올려 다시 한 번 알림 내용을 체크했다.

 [ 케이터 다이아몬드 님이 당신을 팔로우 하였습니다. ]

 이제 막 생성된 듯한 케이터의 마지카메 계정에는 사진 한 장이 업로드 되어 있었다. 최근 찍은 것 같지 않은 저화질의 사진에는 아주 오래 전에 봤었던 눈부신 풍경이 새겨져있었다. #마지카메_복귀기념 #RSA #무려_NRC_2학년때_찍은_사진 #WITH_트레이군

 제일 마지막에 붙은 태그까지 확인한 트레이는 피식 웃으며 첫 번째 좋아요 버튼을 눌렀다.

 #또_보러_가자

 

 

 


2021.01.10

트레이 클로버 X 케이터 다이아몬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