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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하이큐
“조, 좋아해요!” 잔뜩 긴장했는지 바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쿠니미의 귓가에 들려왔다. 고백인가― 그는 우유팩을 흔들던 손을 멈추곤 빨대를 꽂았다. 모처럼 한가한 점심시간을 즐기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장소 선정이 잘못된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타일 공사 때문에 굳게 닫혀 있던 옥상이 다시 개방한 건 그저께였고, 그걸 아는 사람은 쿠니미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람도 별로 없고 조용해서 휴식을 취하기엔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이면 고교 청춘의 한 페이지를 엿보게 될 줄이야. ‘엿듣는 취미는 없는데….’ 분명 어딘가에 넣어두었을 이어폰을 찾으며 쿠니미는 마이 안쪽 주머니를 뒤적였다. 하지만 모퉁이를 사이에 두고 다른 인기척이 있는 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듯 여학생의 목소리는 좀 전보다 훨씬 크..
11월 중순으로 접어든 오늘,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사방이 들떠 있는 아침이었다. 내내 복도를 지나며 눈에 들어오는 쇼핑백은 제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 없는 쿠니미라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 이제는 매년 연례행사처럼 행해지는 기념일―한 겹 벗겨보면 매상을 늘리려는 어른들의 상술에 불과하지만 말이다―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쿠니미의 입장에선 전혀 흥미 없는 날이었다. 단 것을 좋아하는 편이라곤 해도 빼빼로는 평소에도 사먹을 수 있는 거고, 이런 기념일 시즌만 되면 내심 보내오는 ‘그’의 기대에 부흥하기도 귀찮은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 자신이 관심 없는 일이라면 일말의 에너지도 소비할 생각이 없는 그에게는 매 기념일 시즌마다 집요하게 기대를 어필하는 상대가 존재하고 있었다..
“나 영어책 빌려줘.” “넌 그게 아침 인사냐?” 교실에 들어서자 마치 자기 책상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코미의 모습에 코노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좋은 아침. 불만스러운 그의 말투에 코미는 그제야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은 무슨 좋은 아침인지…. 작게 한숨을 쉬며 매고 있던 가방을 그의 무릎에 던지듯 놓은 코노하는 책상을 앞으로 밀어 서랍을 뒤적였다. 하여튼 너나 보쿠토나, 교과서는 제대로 챙기고 다니라고. 이내 발견한 영어책으로 코미의 머리를 툭 치며 코노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쪽지시험 공부한다고 집에 가져가서 그런 거야!” “그 말을 사루쿠이나 와시오가 했다면 믿겠지만 넌 전혀 설득력 없거든?” “어차피 성적도 나랑 비슷한 주제에.” 입을 비죽거리며 투덜대는 코미..
타닥. 타다닥- 앞에서 연신 울리는 키보드 소리에 오이카와는 슬슬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거기엔 정수리 바로 위에서 쏘아지는 에어컨 바람도 한몫했다. 아직 5월인데 도대체 왜 이 카페는 벌써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놓는 것인가, 더위 보다는 추위를 잘 타는 오이카와의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손님이라곤 제일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들 뿐이었는데 냉방비가 아깝지도 않은 것인지 쉴 새 없이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는 카페 주인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머리 아픈 것은 바로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와이즈미였다. 그 동안 서로의 학교생활이 바빠─전공이 달라 서로 겹치는 강의가 하나도 없었던 점도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이와이즈미 쪽에서 약속을 전부 거절했다─제대로 얼굴 마주할 ..
크리스마스답게 거리는 온통 사람들로 붐볐다. 집에서 나올 땐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한 하늘이었지만, 정작 시내로 나오니 거리를 장식한 화려한 조명들로 오히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후타쿠치는 축제 같이 활기찬 분위기를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처럼 걷기도 힘들 정도로 사람이 붐비는 거리는 역시 피하고 싶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날에는 집에서 가족끼리 식사를 하며 텔레비전에서 방영해주는 크리스마스 특선 영화나 보고 있었을 텐데……. 평화로웠던 작년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며 후타쿠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공기를 만난 숨은 허공에 하얀 김을 만들어냈다. 살짝 빨갛게 물든 코끝을 긁적이며 후타쿠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그 녀석이 이런 적은 처음이니까……." 크리스마스에 만나요. 용건만이 간단히 적..
쿠니미에게서는 언제나 달짝지근한 향기가 엷게 풍겨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항상 즐겨먹는 소금 캬라멜로 인한 것이라고 후타쿠치는 생각했다. 캬라멜을 비롯한 달달한 간식을 입에 달고 사는 쿠니미에 비해 후타쿠치는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쿠니미와 만나는 횟수만큼이나 그는 원하지 않아도 단내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있다면 자연스레 달콤한 향기가 후타쿠치에게까지 전해지는 것이다. 후타쿠치는 슬그머니 옆자리의 쿠니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잠이 든 것인지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그 모습에 괜히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겨울 방학이 되어 두 학교의 부 활동 휴일이 겹치는 오늘, 두 사람은 멀지 않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중에 있었다. 방학이라고는 하지만 첫 차라 그런지..
“야쿠 선배 여기에요!” “아…….” 몇 걸음 안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을 향해 길쭉한 팔을 붕붕 흔들어 보이는 리에프의 모습에 야쿠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요즘 시대에 축제라고 유카타까지 챙겨 입는 남고생도 있구나. 말끔하게 차려입은 유카타 부터 맨발의 게다까지 똑바로 갖춘 리에프가 눈에 들어오자 그는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옷장에서 제일 먼저 집히는 반팔 티셔츠에 여름이라 모기를 물릴까 그 위에 걸친 추리닝은 자신이 생각해도 귀찮다고 대충 챙겨 입고 나온 꼴이었다. 괜히 머쓱해지는 기분에 야쿠는 밤바람에 서늘해진 뒷목을 긁적였다. 그런 야쿠는 신경 안 쓰는 듯 어느새 쪼르르 다가온 리에프는 싱글벙글 웃으며 야쿠를 바라보았다. “야쿠 선배가 늦어서 다들 먼저 가버렸어요~” “……내가 미리 쿠..
하아- 따뜻한 입김을 불자 유리창에 하얀 김이 서렸다. 그대로 행주로 쓰윽 닦아냈지만 창문의 지문이나 먼지들은 깨끗이 없어지지 않았다. 영 마음에 차지 않는 지 몇 번이고 쓱쓱 문질러대는 쿠니미였지만 먼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상자들을 옮기다 그 모습을 발견한 하나마키는 잠시 상자를 옆에 내려다 놓고 이것저것 뒤적거리더니 이내 유리세정제를 찾아가지고 왔다. 자, 여기. 하나마키가 건넨 유리세정제를 빤히 내려다보던 쿠니미는 왜 이제야 갖다 줬냐는 표정으로 볼을 살짝 불리며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런 쿠니미의 모습이 귀여운 지 쿡쿡 웃어대던 하나마키는 곧이어 자신의 옆구리를 꾹 꼬집는 쿠니미의 행동에 금세 웃음이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악, 악-! 쿠니미 아파, 그만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되는 쿠니미의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