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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렸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뱉어낼 여유도 없이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태어나서 이렇게까지 있는 힘을 다해 뜀박질한 순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츠무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발걸음을 따라 하늘에 하나둘 피어나는 불꽃이 행여 자신을 그대로 집어삼켜 버릴까 봐, 등 뒤에서 몇 번이고 제 이름을 외치는 타스쿠의 목소리가 더는 귓가에 들리지 않을 때까지. * * * 그에게 내려진 건 조금 심한 찰과상이었다. 츠무기가 홀로 병원 문을 나설 때, 팔다리에는 물론이고 얼굴까지 덕지덕지 거즈를 붙이고 있었다. 더불어 내려진 발목 염좌라는 진단은 집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더뎌지는 원인 중 하나였다. 맨 상처를 보고도 그렇게 걱정하셨는데, 반깁스까지 보신다면 엄청나게 놀라시겠지…. 지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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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위태로워 보였다.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광경에 대한 반리의 생각이었다. 시야가 가려질 만큼 높이 쌓인 책들을 두 손으로 힘겹게 받친채 한 발 두 발 걸어 나가는 모습은 누가 봐도 불안했다. 그런 모습을 본다면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반리의 손길이 멈추는 것도 당연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교실에서 잠이나 잘 걸, 괜히 답답하다고 복도에 나와 있는 게 아니었다. 옮길 물건이 많으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든지, 그럴 상대가 없다면 나눠서 옮기든지. 누군지는 몰라도 요령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는 그의 행동에 반리는 한숨만 나왔다. 그는 창가에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섰다. 일단은 도와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의도와는 다르게 반리가 무언으로 다가서자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랐는지 상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츠즈룽~ 수고피코! 카즈나리·미요시, 지금 다녀왔습니다~!” “시끄러워….” 우렁차게 외치며 벌컥 열어젖힌 102호 문이었지만, 카즈나리의 시선에 들어온 건 츠즈루가 아닌 마스미였다. 물론 마스미와 츠즈루가 동실이니 당연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소란스럽게 귀가한 자신을 노려보는 마스미의 모습에 카즈나리는 가볍게 사과를 전했다. “미안, 미안~ 맛스, 혹시 츠즈룽 아직 안 왔어?” “몰라. 관심 없어.” “역시 그치~? 그럼 수고!” 싸늘하게 돌아온 마스미의 대답에 카즈나리는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며 곧바로 돌아섰다. 일부러 일찍 왔는데 역시 없나…. 문고리를 잡는 그의 얼굴에 옅은 아쉬움이 남았다. “잠깐, 너.” “응?” 그의 휴식 시간을 방해할까봐 얼른 나가려던 카즈나리였지만 갑자기 자신을 ..
어라? 틈새를 통해 조심스럽게 밑을 내려다 본 카즈나리는 순간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번 임무는 어느 귀족들의 밀담을 엿듣고 그 내용을 기록해오는 일이었다. 미리 받은 자료에서 목표물은 분명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었는데 말이지…. 카즈나리는 지금 제 시야에 들어오는 사내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언뜻 자신의 또래 정도로 보이는 청년은 진지한 얼굴로 서책을 넘기고 있었다. 푸른빛의 기모노와 그 위에 단정하게 차려입은 하오리까지. 제법 귀하게 자란 티가 나는 그는, 얼마나 시간이 지나더라도 계속 바라볼 수 있을 만큼 편안한 인상의 청년이었다. 카즈나리가 그의 차분한 분위기에 이끌려 멍하니 바닥만 내려 보고 있던 것도 잠시, 문득 떠오르는 건 고용주의 얼굴이었다. 생각해보니 느긋하게 감상할 때가 아니었다. 왜인지..
"으음……." 요란스럽게 울리는 알람 소리에 먼저 눈을 뜬 건 카즈나리였다.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의 첫 소절이 끝나기도 전에 다급하게 핸드폰을 찾아낸 건 그리 큰 이유가 아니었다. 행여 노랫소리에 잠이 깨버렸을까 슬쩍 제 옆의 상대를 바라보는 카즈나리의 시선은 유독 조심스러웠다. 걱정과는 다르게 두 눈을 꼭 감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얼굴이 보이자 그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해가 중천에 다다른 대낮, 창문을 통해 은은하게 스며드는 햇살이 잠든 츠즈루의 얼굴 위로 비쳤다. 전날 제대로 말리지 않은 앞머리는 평소와 다르게 그의 이마를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고 그 덕분인지 좀 더 앳되어 보이는 얼굴에 카즈나리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꾹 삼켰다. 이렇게 보니깐 츠즈룽 완전 어려보이구… 진심 큐트! 잠시 동..
톡톡 거리며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빗방울은 마치 자신의 방문을 알리는 노크 소리 같았다. 잔잔하게 카페 안을 흐르는 노래에 불쑥 끼어들은 한 줄기의 빗소리는 본래의 선율을 흩트리는 법 없이 그저 묵묵히 자신의 연주를 이어갔다. 그 탓인지 대본을 체크하던 츠무기가 그 소리를 깨달았을 때, 빗줄기는 이미 처음 내리기 시작했을 때보다 제법 굵어져있었다. 분명 기숙사를 나섰을 때…… 아니, 카페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이었는데. 겉모습에 비해 그리 꼼꼼한 성격이 아닌 츠무기는 오늘도 평소와 같이 일기예보를 챙겨보지 않았다. 날씨도 결국 운이랑 비슷한 거라서, 게다가 언제나 일기예보가 맞는 예고만 하는 건 아니니깐. 그럼 오늘의 운수는 그렇게 좋지 않았던 거라고 치면 되지 않을까! 그런..
“역시 꽃놀이는 흥겹군! 이유 없이 사람을 두근거리게 하는 게 꼭 마법 같지 않나?” “아리스는 마법이나 괴담 같은 건 안 믿는 쪽 아니었어?” “크흠, 그것도 다 옛날 일이군.” 뭐, 그런 일도 있었고 말이지…. 혼자 뭘 그렇게 떠올리는지 작게 웃음을 띠우는 호마레의 모습에 히소카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어차피 물어봐도 또 다른 이야기만 잔뜩 떠들어버릴 것 같으니깐 이건 패스. 두 사람이 함께 꽃구경을 온 건 꽤나 충동적으로 정해진 약속이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도 애매한 게 단순히 기숙사에 둘이 있게 된 날이 겹쳐 가볍게 나온 산책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전날 히소카와 호마레의 꽃구경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 오미가 마련해준 도시락과 호마레가 준비한 마시멜로우 두 봉지. 심플하기 짝..